표정의 책임은 절반 정도 그 표정을 짓는 사람에게 있고, 나머지 절반은 표정을 해석하는 사람에게 있다는 생각을 해요.
나는 민폐라는 말의 뜻을 옮기기를 포기하고 '투 머치'를 강조해서 말했다. 해먼드 할머니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우리 클럽의 모토가 뭐였지요?"
"재미, 먹거리, 친구!"
할머니들이 입을 모아 Fun, Food, Friend라고 외쳤다.
"그중에 제일 중요한 건?"
"친구!"
셜리 해먼드, (이 편지를 다른 셜리들에게도 읽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는 지금 공항에 있어요. 멜버른을 떠나 울루루로 갈 생각이에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찾는 사람이 거기에 간 것 같아요. 셜리들 덕분에 용기낼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얼마나 고마운지 이 짧은 편지엔 다 담을 수도 없어요. 언젠가 꼭 다시 만나요.
조금 더 길게 썼지만 요약하면 그런 내용이었다. 순식간에 답장이 왔다.
리틀 셜리, 방금 그 메일을 멜버른에 사는 셜리 클럽 빅토리아 지부 모든 회원들에게 전달했어요. 참고로 셜리 클럽은 빅토리아 지부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 소수지만 지금 리틀 셜리가 가려는 노던준주에도 셜리 클럽 회원들이 있어요. 지금부터 다른 도시의 셜리들이 리틀 셜리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을 알아보려고 해요. 이 대륙 안에 있는 이상 셜리 곁엔 항상 클럽이 있다는 걸 기억해요.
해먼드 할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동안 왠지 눈물이 솟아서 참느라 애를 먹었는데, 답장을 보고서는 결국 울지 않을 수 없었다.
Don't you dare touch my girl! 라고 소리치면서 쿵쾅쿵쾅 뛰어오는 모습이 코뿔소 같았다. 에밀리 할머니가 평소엔 다정하지만 화나면 셜리 할머니보다 무섭구나. 부인은 황급히 수영장을 떠났고 나는 할머니가 보는 앞에서 오래오래 물장구를 치고 놀았다.
여러 번 얘기했지만, 셜리라는이름은워낙 올드 패션드라서 클럽 회원들이 대부분 나이가 많으시잖아요. 부고 메일을 받으면 일단 슬프기도 하지만 셜리라는이름이 멸종하고 있는 듯한 묘한 느낌을 받기도 해요. 이미 많은 이름들이 사라졌을테니까 호들갑 떨지 않고 받아들여야 할 일이겠지만, 셜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지구상에 하나도 없는 날은 아주 천천히 왔으면 좋겠어요. 설마 내가 이 행성의 마지막 셜리가 되지는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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