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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페레 공항>
인생에서 가장 후회했던 경험과 그 이유를 기술하시오.
나는 하얀 바탕에 깜빡이는 커서만 물끄러미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나는 봉투를 좀더 가까이 가져와 대각선으로 쓰인 글자를 읽어나갔다.
Do not bend(Photo inside)
말 그대로 노파심이라는 게 이런 걸까. 사진이 지구 반대편 먼 길을 거쳐가는 동안 행여나 구겨질까, 노인은 많이 걱정했던 것 같다. 나는 시리얼 상자를 가위로 자르고, 그것을 풀로 사진의 뒷면에 단단히 붙이는 노인의 모습을 상상했다. 하얀 밤, 태양이 뭉근한 빛을 내는 창가에 앉아 가위와 풀과 사진 그리고 편지 사이를 천천히 오가며 더듬거리는 노인의 쭈글쭈글한 손을.
"글씨를 힘차게 쓰던 용감한 한국의 숙녀분께"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구나. 나는 마치 그 편지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노인의 글을 읽기 시작했다. 한줄 한줄 읽어내려 갈 때마다 알 수 없는 곳을 향한 미안함의 눈물이 자꾸 흘렀다. 편지의 끝에는 연락하고 지내자는 말과 함께 숫자 열세개가 적혀 있었다. 노인이 전화번호까지 적어줬었어? 왜 나는 이런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을까. 대체 왜.
나는 눈물을 닦고 내가 가진 가장 커다란 노트와 마커펜을 꺼냈다. 그리고 큼직한 글씨로 미루고 미뤘던 편지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D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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