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page10. 네가 좋아하던 노래, 좋아하던 영화 대사, 좋아하던 자리에서 보이던 풍경들. 네 사무실 책상에 늘 놓여 있던 페퍼민트 캔디통의 색깔까지. 나는 너에 관해서라면 무엇이든 떠올릴 수 있어.
푸르지 않은 지구를 보며 나는 너를 생각해.
page32. 어쩌면 네가 5년 동안 룸메이트를 바꾸지 않은 것이 단지 내 입이 다른 사람들에게 너의 사생활을 떠들어 대지 않을 만큼 무거워서라고 해도 나는 상관없었어. 네가 원한다면 나는 끝까지 지킬 거야. 너의 초조함, 너의 눈물, 너의 짝사랑을 포함한 모든 비밀. 이제는 비밀을 들어 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해도.
pge34. 안녕. 지워질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할게. 그리고 이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거야. 너는 나의 세계였으니, 나도 너에게 세계를 줄 거야.
[아주 높은 곳에서 춤추고 싶어]
page63.
"잊어버려."
리아가 두 손을 한껏 위로 뻗어 제롬의 눈을 가렸다.
"잊을게."
제롬이 웃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기억 안 할래.
그런데 기억에 남을 것 같아.
page66. 엄마는 제롬에게 말했다. 앞만 보고 걸으라고. 그래서 제롬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뒤돌아봐도 거기에는 아무도 없을 테니까. 엄마도 아빠도 인도코끼리도. 하지만 제네시스에 들어오고 가끔 뒤를 돌아보면 아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이 화를 내고 있으면 그곳으로 가서 서 있고 싶었다. 그래서 제롬은 그렇게 했다. 뒤에서 드리워지는 긴 그림자가, 리아의 기억에 남길 바라며.
page72-73. 비록 한 번도 달에 간 적은 없지만 제룸은 달 위에 서 있는 자신을 떠올릴 수 있었다. 빨간 구두를 신고 스텝을 밟는 모습을. 우주복은 입지 않아도 될 것이다. 상상일 뿐이니까. 소리가 없는 공간이겠지만 박수 소리도 들릴 것이다. 꿈이니까. 리아가 제롬을 들어 올리고 빙글빙글 돌 수도 있을 것이다. 달에서라면.
제롬은 그것도 기억하기로 했다.
[궤도의 끝에서]
page80-81. 리우는 좀 더 길게 남은 다리에만 의족을 끼우고 다른 한쪽 팔로는 슈의 어깨를 짚었다. 보육원 안에서라도, 이렇게 하자. 부탁할게. 네가 좀 불편하겠지만...... 너무 아파. 그러니까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만 이라도. 그 말에 슈가 깔깔 웃었다.
난 원래 남의 시선 신경 안써. 너 좋을 대로 해.
리우는 슈의 어깨에 의지해 지뢰를 피하며 돌아 다녔다.
그 어깨를 두고 떠나온 것은 달에 가고 싶어서였다.
page84.
"이게 우리 작별 인사가 되면 좋겠다."
리우만큼이나 긴장했는지 차갑던 슈의 손. 줄곧 잡고 다니던 손. 굳은 살이 자리 잡아 가는 손.
그 손을 놓아야 둘의 계획은 성공이겠지만, 리우는 그 손을 영원히 놓고 싶지 않기도 했다.
page85-86. 골격 평균 길이로 맞춘 의족을 달자 리우의 키는 155센티미터였다. 리우는 그때 처음으로 자신의 키를 알았다. 슈, 나는 내 키가 몇인지도 몰랐어. 그리고 너도 내 키가 몇인지 몰랐고.
아마 앞으로도 모르겠지.
page90-91.
"달도 여러 가지 광물이 뒤섞인 땅이야. 광물의 비율에 따라 많은 게 달라지지. 모래땅에서는 공이 구르지 않고 유리 위에서는 끝없이 구르는 것처럼."
단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리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지면을 구성하는 광물이 무엇인지 안다면, 달에서는 땅만 더듬어도 길을 찾을 수 있어.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지면 속성이 균등하지 않기 때문에 메세지를 새길 때 문라이터는 다양한 도구를 사용해. 그래서 지도가 필요한 거지. 각각의 도구를 쓸 때 에너지 낭비를 최소한으로 줄이려면 공학도 필요하고."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니.
우주는 캄캄하니까 자신은 갈 수 없다고 슈는 말했다. 땅만 더듬어도 길을 찾을 수 있다면 슈는 달에서는 길을 잃지 않을 수도 있었다. 진흙땅과 자갈밭과 모래밭을 구별해 가며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따. 아주 멀리 돌아오는 길이라도, 불가능은 아니었다.
같이 올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떠나보낸 미련이 한 바퀴 돌아 다시 리우의 가슴을 두드렸다.
page106-107. 슈, 우리의 궤도가 평행선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평행선이 아니라면 하나쯤은 교차점이 있지. 우리는 그 보육원에서 교차점을 이루었고, 시간이 지나 다시 멀어졌다 해도 교차점이 있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 교차점이 누군가의 생을 구하기를.
"슈가 한 일이나 마찬가지야."
리우가 대답했다.
[팽창하지 않는 우주를 원해]
page132. 단. 사람들은 자기가 미워해야 하는 대상이 뭔지 모를 때가 많아.
엄마. 누구를 미워해야 할지 몰라서 그 미움을 모두 자신에게 향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알았나요. 저는 그런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토요일의 아침인사]
page189.
"AZ-884를 우리는 '신'이라고 불렀어. 조안이 지은 이름이지.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어."
신의 말씀을 달에 새긴 곳. 신을 믿는 자들이 세웠으나 과학의 최정상인 곳. 제네시스. 허구의 소행성이 가진 이름은 신. 존재한다면 지구를 지켰을 그 무엇. 그러나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직접 확인할 수도 없는 것. 단지 있다고 믿는 것만이 최선인 것.
page193.
"리아의 단독 달 출장을 요구합니다. 기간은 최소 한 달. 최대는 인간이 달에서 버티는 한도까지."
네가 이 지구에 다시 돌아올 희망으로. 설령 이 지구에 내가 없더라도.
page196. 기적처럼 너와 내가 다시 아침인사를 할 수 있기를. 세은은 메시지를 저장하고 부스 안에서 심호흡을 했다. 부스 밖으로 나가기 위해. 최후의 최후의 최후까지 싸우기 위해. 지구를, 미래를, 가능성을 빼앗기지 않고 버티기 위해. 뺏기지 말라고 네가 그랬으니까.
나는 그 말을 평생 잊지 않았어.
[에필로그: 토요일, 당신에게]
page200-201. 하지만 당신은, 유리아씨는, 제네시스가 온 힘을 다해 살리려고 한 사람이니까요. 제네시스에게 빚을 진 우리가 갚을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을 데리러 가겠습니다.
토요일, 지구에서
살아남은 탐사자 드림
'버리지 못하는 문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장51. 박현주-까마귀가 울다 (0) | 2023.04.02 |
---|---|
#문장50. 예소연-사랑과 결함 (0) | 2023.04.01 |
#문장48. 정세랑-절연 (0) | 2022.12.24 |
#문장47. 천선란 - 랑과 나의 사막 (0) | 2022.11.14 |
#문장46. 타일러 라쉬-두 번째 지구는 없다 (0) | 2022.10.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