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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35. 유선애-우리가 사랑한 내일들 행복했지만 동시에 부끄러웠다. '각자도생하는 거지 뭐' 하며 자주 누워 지낸 내가, 이번 생은 틀렸다고 까분 내가, 당신과 함께 행동하고 말하지 못한 내가. 싸우고자 나서는 일은 두렵다. 최소한 번거롭다. 그럼에도 떨치고 싸우고자 하는 사람, 다짐함으로써 용기를 장전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만드는 세계라면 철저하게 망가진 지구든, 이역만리의 외계행성이든 그 어디라도 나는 기꺼이 따라 나서고 싶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보다는 거기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람이 멋있죠. 말만 앞선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요. 말은 너무 쉽거든요. 바꿔야 한다고 말하기보다 그냥 내가 바꾸고 싶어요. 그렇게 말은 아끼고 존재 자체가 힘이 되는 사람이고 싶어요.
#문장34. 조해진-완벽한 생애 시징, 혹시 당신도 홍콩에서 도망친 건 아닌가요? 메모의 마지막 단락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래요, 나는 제주로 도망치려는 것입니다. 도망치는 건 무섭지 않은데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또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요?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사실 단 하나인데, 그건 .... 메모는 거기서 끝났고, 은철이 덧쓴 글자는 끝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문장33. 천선란-나인 "아니. 그 말 한마디로 인간들은 네가 뱉은 모든 말을 거짓말로 여길테니까." 나인은 이런 말들을 뼈에서 나온 말이라고 표현했다. 깊은 상처는 뼈에도 흔적을 남기는 법이니까. "인간들은 그래. 믿을 수 없는 게 하나 생기면 모든 걸 다 가짜로 만들어 버려." 비밀을 밝히지 않는다는 건 멀어진다는 걸까. 말하지 못하는 게 생길 때 관계에도 거리가 생기는 걸까. 그럼 끝끝내 말하지 못한다는 건, 그렇게 멀어지다 결국 남이 된다는 걸까. 학교 가는 길에 버스 정류장에 붙어 있는 전단지를 보았다. 여기에 붙여 봤자 아무도 안 본다고 했는데 아저씨는 기어코 붙였고, 나인은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세상 바깥에라도 그 이름을 붙여두고 싶은 것이라고. 파도에 휩쓸릴지라도 모래에 이름을 적어 두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