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버리지 못하는 문장

(68)
#문장39. 박서련-이다음에 지구에서 태어난다면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목소리를 가다듬고 내가 건넨 말에 닐바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슬프지 않아요. 약간은 경이감, 약간은 안도감, 또 대부분은 두려움." "경이감이요?" "저 작은 외계인이 내가 알던 그 존재라는 경이감, 그 존재가 죽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안도감." "그리고요?" "두려움은 조금 복잡해요. 동일하고 연속적인 존재지만 동시에 제가 알던 그 존재가 아니기도 하다는 것. 저를 포함해 메란드가의 모든 것을 모른 채 자랄 거고, 저만 일방적으로 그 존재를 기억할 거라는 것." 그건 축복일까 저주일까. 사랑하는 존재가 먼 곳에서나마 다시 생명을 얻어 삶을 이어가지만, 그 삶이 자기와는 무관할 거라는 사실. 메란드가인이 아니고, 메란드가인을 가까이에..
#문장38. 이민진 - 장식과 무게 생각해보면 영우 씨에겐 대범한 구석이 있었는데, 가끔 사소한 위법을 아무렇지 않게 저질렀고 지나칠 수 있는 타인의 실수나 잘못을 끝까지 따졌다. 그런 영우 씨의 모습을 마주하는 게 불편했던 나는 그녀에게 품은 호감을 간직하기 위해서 이후에 본 것들을 잊어야 했다. 그래야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 식으로 나는 해니와 영우 씨를 기억했다. 가장 상징적인 시간만 취하고 나머지는 버렸다.
#문장37. 은희경-장미의 이름은 장미 취한 현주는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쓸 수 있을까 생각했다. 이 도시에 대한 이야기는 쓰지 못할 게 확실했다. 이곳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듯하지만 문이 하도 많아 좀처럼 안쪽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도시, 언제까지나 타인을 여행객으로 대하고 이방인으로 만드는 도시였다. 처음에는 환대하는 듯하다가 이쪽에서 손을 내밀기 시작하면 정색을 하고 물러나는 낯선 얼굴의 연인 같았다. 그것은 현주가 쓰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신발을 신는 현주의 등뒤에서 코베인이 노래를 따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톰 소령, 지상관제소 나와라, 행성 지구는 푸르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현주는 잠시 그쪽을 돌아보았다. 눈으로 현주를 배웅하고 있었던지 코베인이 맥주병을 든 채로 한손을 조금 들어 보였다. 한낮..
#문장36. 황모과-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 해라를 찾아야 했다. 그건 내가 세상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와 같은 의미였다. 여자아이 몇 명쯤 사라져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세상은 내 세계가 아니었다. 91page
#문장35. 유선애-우리가 사랑한 내일들 행복했지만 동시에 부끄러웠다. '각자도생하는 거지 뭐' 하며 자주 누워 지낸 내가, 이번 생은 틀렸다고 까분 내가, 당신과 함께 행동하고 말하지 못한 내가. 싸우고자 나서는 일은 두렵다. 최소한 번거롭다. 그럼에도 떨치고 싸우고자 하는 사람, 다짐함으로써 용기를 장전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만드는 세계라면 철저하게 망가진 지구든, 이역만리의 외계행성이든 그 어디라도 나는 기꺼이 따라 나서고 싶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보다는 거기에 있음을 보여주는 사람이 멋있죠. 말만 앞선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요. 말은 너무 쉽거든요. 바꿔야 한다고 말하기보다 그냥 내가 바꾸고 싶어요. 그렇게 말은 아끼고 존재 자체가 힘이 되는 사람이고 싶어요.
#문장34. 조해진-완벽한 생애 시징, 혹시 당신도 홍콩에서 도망친 건 아닌가요? 메모의 마지막 단락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래요, 나는 제주로 도망치려는 것입니다. 도망치는 건 무섭지 않은데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또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요? 내가 듣고 싶은 말은 사실 단 하나인데, 그건 .... 메모는 거기서 끝났고, 은철이 덧쓴 글자는 끝내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문장33. 천선란-나인 "아니. 그 말 한마디로 인간들은 네가 뱉은 모든 말을 거짓말로 여길테니까." 나인은 이런 말들을 뼈에서 나온 말이라고 표현했다. 깊은 상처는 뼈에도 흔적을 남기는 법이니까. "인간들은 그래. 믿을 수 없는 게 하나 생기면 모든 걸 다 가짜로 만들어 버려." 비밀을 밝히지 않는다는 건 멀어진다는 걸까. 말하지 못하는 게 생길 때 관계에도 거리가 생기는 걸까. 그럼 끝끝내 말하지 못한다는 건, 그렇게 멀어지다 결국 남이 된다는 걸까. 학교 가는 길에 버스 정류장에 붙어 있는 전단지를 보았다. 여기에 붙여 봤자 아무도 안 본다고 했는데 아저씨는 기어코 붙였고, 나인은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은 세상 바깥에라도 그 이름을 붙여두고 싶은 것이라고. 파도에 휩쓸릴지라도 모래에 이름을 적어 두는 것..
#문장32. 김초엽-방금 떠나온 세계 공동체의 미덕은 잊고 보내주는 것이었다. 한정된 인지 공간에 모든 기억을 남길 수는 없었다. 기록되는 것은 짧은 생을 살다 떠나는 사람들이 아니라 불변하는 것, 자연적인 것, 법칙과 이치들이어야 했다. 이브를 기억하기 위해서 나는 인지 공간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이제 단희에게도 입자들은 의미라기보다는 냄새에 가까워졌다. 둔감해진 후각기관은 한때 조안이 했던 것처럼, 공기중에서 어떤 기억과 감정을 읽었다. 입자들이 단희를 그 시절로 데려갔다. 의미로는 포착할 수 없는 것들에게로. 너무 구체적이어서, 언어로 옮길 수 없는 장면으로. 조안이 말했던 그 공간들로.
#문장31. 김초엽-사이보그가 되다 하지만 미래가 아닌 지금 이곳에서 조금 더 잘 살아갈 가능성은 없는 걸까? 치료와 회복만이 유일한 길처럼 제시될 때 장애인들의 더 나은 삶은 끝없이 미래로 유예된다 - pp 38 그렇기에 우리는 불완전한 기술과 불완전한 인간의 몸으로 지금 이 세계를 바꾸어 나가야 한다. 언젠가 나타날 기적의 과학기술에 이른 찬사를 보내는 대신, 이미 현실에서 기술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이보그들의 구체적인 경험에 주목해야 한다. - pp 88 낙인이 강력한 사회일수록 장애와 질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감추기를 선택한다. 우리가 상상하는 미래 세계에서는 기계 몸을 드러낸 사이보그들이 거침없이 활보하지만, 우리의 현실 세계 속 사이보그들은 자신을 끊임 없이 감추고 숨긴다 - pp 135
#문장30. 정세랑-이만큼 가까이 여자애가 웃지 않고 비참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므로 호감이 갔다. 웃어주고 싶지 않을 때 웃지 않는 사람이라면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연이는 그렇게 2번 버스 멤버가 되었다.